
미 대사의 '발 밑에 던져버린 가방'이 한국 관료 사회에 던진 묵직한 돌직구
며칠 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첫 주한 미국 대사인 미셸 스틸 대사가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한국계 여성 최초의 주한 미국 대사라는 타이틀만큼이나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언론 앞 기자회견장에서 보여준 그의 돌발 행동이었다.
회견대 마이크 앞에 선 스틸 대사는 주변 보좌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발밑 바닥에 툭 던져두듯 내려놓았다. 패대기치듯 가방을 내려놓아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그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원고를 펼쳐 든 채 아주 유창한 한국어로 입국 인사를 건넸다. 연설이 끝난 뒤에는 바닥의 가방을 슥 집어 들고 쿨하게 현장을 떠났다. 2008년 캐슬린 스티븐스(심은경) 전 대사가 보여주었던 이른바 '탈권위 가방 내려놓기' 레전드 장면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이튿날 스틸 대사는 편안한 흰 티셔츠 차림으로 남대문시장에 나타나 호떡집 상인과 손하트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도저히 의도된 연출로 보이지 않는 이 소탈한 행보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미국 최고위 외교관의 이러한 행보는 우리에게 신선함을 넘어 깊은 씁쓸함을 남긴다. 최근 한국 공직 사회와 공공 부문의 최고위층들이 보여준 행태와 너무나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우원식 전 국회의장이 재임 중 14차례 해외 출장을 다니며 무려 82억 원이 넘는 예산을 썼고, 놀랍게도 모든 출장에 배우자를 동행시켰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큰 논란이 일고 있다. 노태악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역시 재임 기간 3차례의 해외 출장을 모두 '부부 동반'으로 다녀온 뒤, 뒤늦게 수천만 원의 출장비를 반납하고 수사 대상이 되는 추태를 부렸다. 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동행하는 국회사무처나 선관위 직원, 경호·의전 인력 등 '대규모 수행단'의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과거부터 수많은 공기업 사장들의 해외 출장 기록을 들춰보면 가관이다. 공무 수행이라는 핑계 뒤에 슬그머니 아내를 동행시켜 하루 숙박비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특급호텔 최고급 스위트룸에 투숙하곤 했다. 국민의 혈세로 '마누라 호강시키기성 외유'를 다녀오는 해묵은 관행이 공공 부문 전반에 속속들이 박혀 있는 셈이다.
정작 피 같은 주주들의 돈으로 움직이며 초분 단위의 경쟁을 벌이는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의 CEO나 임원들은 해외 출장을 갈 때 실무진은 잘해야 한두 명만 조용히 대동하는 것이 요즘 재계의 상식이다. 심지어 이들은 출장지에서 화려한 스위트룸을 찾지 않고, 일반 비즈니스용 더블룸에 주로 투숙한다. 방이 크고 화려해 봐야 업무 출장길에 잠만 자고 나올 공간인데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철저한 실용주의적 계산이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성과를 내야 하는 진짜 프로들은 겉치레 의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반면,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러 간다는 공직자들과 공기업 사장들이 시장의 최전선에 있는 대기업 총수들보다 훨씬 더 비대하고 거창한 의전 조를 꾸리고 자신은 스위트룸을 드나드는 모습은 그 자체로 모순이자 뻔뻔한 도덕적 해이다.
필자는 한국 고위 관료들의 해외 출장길을 현지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들이 공항에 내리면 현지 대사관이나 공관 직원들이 일제히 출동해 고위 관료의 '심기 경호'를 하느라 바쁘게 캐리어를 대신 받아 들고 영접 차량 문을 열어준다. 정작 현지에서 치열하게 자국 국익을 챙겨야 할 외교 인력들이 한국에서 온 '상전'들의 수하물 직원이 되어 인력을 낭비하는 구태의연한 관행이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공직 사회에서 '자신의 짐은 자신이 직접 책임진다'는 원칙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스틸 대사가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은 것은 아랫사람을 부리는 권위보다, 오직 언론 및 한국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본질적인 업무'에만 집중하겠다는 프로페셔널함의 표현이다.
진정한 권위와 소통은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아내 손을 잡은 채 가방을 대신 들게 하는 겉치레 의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방을 바닥에 던져두더라도 일과 현장, 그리고 만나는 국민에게 진심으로 집중하는 미 대사의 모습은 한국 공직 사회에 묻고 있다. "당신들의 대규모 의전과 호화 스위트룸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공항 VIP실에서 보여준 미 대사의 쿨한 가방 내려놓기와 남대문시장의 흰 티셔츠 행보는, 여전히 과잉 의전과 특권 의식에 갇혀 세금을 낭비하는 한국 관료들이 뼈저리게 보고 배워야 할 혁신의 자세다. 김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