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글의 품격)/이기주
퇴고 ―삶과 글이 그리는 궤적은 곡선이다 어린 시절 큰집 근처에서 노 젓는 배로 저수지를 건전 적이 있다. 배라고 해봤자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본 일밖에 없는 나로서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뱃사공이 몇 명 되지 않는 승객을 태우고 노를 젓기 시작하자 ‘삐거덕’ 소리와 함께 낡은 목선이 수면을 미끄러졌다. 하얀 물보라가 뺨과 옷깃을 적셨다. 늙수그레한 사공은 뱃머리를 보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며 노를 저었다. 그 모습이 내겐 이채롭게 보였다. 배가 저수지 중간을 지날 때쯤 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공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정면을 똑바로 보지 않고 노를 저어도 괜찮아요?” 사공은 한바탕 크게 웃으며 답했다. “뭐라고? 하하하. 이 배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거라면 앞을 똑바로 봐야 할 테지.” “네? 배는 직선으로 가지 않나요? 물에 떠서 똑바로 가잖아요.”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 이런 배는 노를 저을 때마다 옆으로 기우뚱거리면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간단다.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면서 배가 움직이는 셈이지, 그러니 건너편 선착장에 도착하려면 뱃길을 계속해서 고치면서 노를 저어야 해. 뭐,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그러할 테고 이해되느냐?”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을 기억한다. 노 젖는 이치를 초등학생이 이해할 리 만무했다. 난 멀뚱멀뚱한 눈으로 사공과 노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흔히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삶의 바다 곳곳에 무수한 고통이 암초처럼 놓여 있는 탓이다. 고통에 부딪혀 좌초되지 않기 위해 우린 수시로 항로를 변경한다. 애초에 정해진 길은 없다. 그저 끊임없이 길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한 편의 글을 써나가는 일도 문장을 고치는 행위의 연속이다. 《스튜어트 리틀》, 《샬롯의 거미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동화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는 “위대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위대한 고쳐쓰기만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일수록 문장을 수정하는 데 공을 들인다. 단언컨대, 글을 잘 쓰는 사람 중 상당수는 대개 글을 잘 고치는 사람이다.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가 있다. 한때 천재 작가로 불렸지만 지금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포레스터숀 코너리라는 노인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닌 청년 자말롭 브라운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우정을 쌓는 이야기다. 포레스터가 자말에게 조언을 건네는 대목에서 이런 말을 들려준다. “초고는 가슴으로 쓰되, 그다음은 머리로 써야 하네” 여기서 ‘그다음’은 여러 번 생각하여 초고를 고치고 다듬는 과정 ‘퇴고’를 가리킨다. 그럼 머리로 써야 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머리를 잘 굴려야 한다는 뜻일까. 그보다는 초고를 쓸 때보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보다 폭넓은 시간과 섬세한 감각으로 글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퇴고는 글쓰기의 마무리 과정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글을 마주하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퇴고는 단순히 초고라는 들판에 흩어져 있는 오탈자와 띄어쓰기 오류를 색출해서 바로잡는 일이 아니다. 초고의 들판을 헤집고 다니면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활자의 풍경을 바라보며 글의 주제와 흐름 등을 살피는 일이다. 한마디로 퇴고는 나무를 관찰하는 동시에 숲을 조망하는 행위다. 숲이라는 방대한 공간에서 나무를 관찰하려면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멀리선 나무의 특징을 파악하기 어렵다. 매끄럽지 못한 표현과 맞춤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수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이와 달리 글의 흐름과 구조를 검토할 땐 작은 부분에 연연하기보다 넓은 시각으로 살펴야 한다. 숲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면 잠시 숲을 벗어나 넒은 시야를 확보해야 하듯이 말이다. 퇴고를 이야기할 때 대개 “글을 고치는 횟수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횟수 못지않게 퇴고에 임하는 시기와 자세도 중요하다. 나 초고를 작성한 후 곧바로 퇴고에 돌입하지 않는다. 원고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둔다. 글 안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으면 글을 냉정하게 바라본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초고는 생물과 같아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과 충격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어느 정도 원고를 쓰고 나면 ‘내가 여기까지 해냈구나…’하는 성취감이 작가의 마음에 들어차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글의 수정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초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만심과 대견함이라는 리본을 과감히 뜯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퇴고를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초고를 며칠 묵혀뒀다가 사나흘 만에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낭독이라는 열쇠로 ‘퇴고의 문’을 열어젖히고 원고 안으로 들어간다. 뭐랄까 ‘나’를 향해 이야기를 들려주듯 문장을 읽어가며 글을 수정한다. 어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원고를 낭독할 때도 있다. 그땐 두 명 이상이 읽는 것으로 일종의 독회讀會를 하는 셈이다. 낭독은 잠든 문장을 흔들어 깨운다. 내 육성을 듣고 기지개를 켜는 활자들을 매의 눈으로 살펴보노라면, 미처 잡아내지 못한 실수와 오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키보드를 조각칼 삼아 글을 깎는다. 문장의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장황하게 늘어지는 표현을 단축하고 어색한 단락은 밭을 뒤집듯 갈아엎어 문장을 다시 배열한다. 퇴고는 수학으로 치면 덧셈보다 뺄셈에 가깝다. 내용을 보완한답시고 마구 문장을 쑤셔 넣다 보면 글의 얼개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장르 문학의 거장 스티븐 킹이 “나는 ‘수정본+원본-10%’라는 공식에 따라 소설을 쓴다”고 밝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보면 전쟁의 와중에 할머니 집에 맡겨진 쌍둥이 형제가 등장한다. 형제는 사전을 읽으며 철자법을 익히고 일상을 노트에 기록한다. 그들은 명백한 사실만을 문장에 담는다. 이를테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는 표현 대신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고 쓴다. “당번병은 친절하다”가 아니라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는 문장을 적는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때론 모소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글쓰기 방식은 퇴고와 관련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글쓴이의 감정에 떠밀려 정확성과 객관성이 찬밥 신세로 전락한 글은, 독자 입장에선 먼지 낀 거울처럼 흐리터분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초고를 에워싼 불필요한 포장지, 예컨대 과잉 감정 따위를 퇴고 과정에서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연필을 깎아 흑심을 드러내듯, 모호함을 걷어내 글에 담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아무리 부지런히 문장을 매만지고 그 이음매를 목수가 사포질하듯 매끄럽게 다듬어도 수정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구토증을 느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퇴고推敲인가. 아니면 토고吐鼓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뜻대로 퇴고가 이뤄지지 않는 날이며 누군가 내 귀에다 대고 “명창정궤明窓淨几!”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다. 서구의 미니멀리즘과도 닿아 있는 이 말은 “햇빛이 잘 비치는 창가에 놓여 있는 깨끗한 책상”이라는 뜻이다. 예부터 문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서재의 모습이다. 어디 서재뿐이랴. 퇴고를 거친 문장이야말로 정갈해야 한다. 우린 지면과 화면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상에 살고 있다. 독자는 종이 책을 넘기며 글을 읽기도 하고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활자를 음미하기도 한다. 퇴고를 통해 가독성뿐 아니라 ‘눈에 띄는 정도’를 의미하는 가시성可視性, visibility을 확보하는 글이어야만 지면과 화면을 넘나들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다. 일전에 어느 연예인이 방송에서 “삶의 길은 어어져 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삶의 질곡과 부침을 겪은 듯한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하던 일을 멈추고 귀담아 들었다. “한창 잘나갈 때는 이 길과 저 길이 다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은 길만 가려 했죠. 나중에 불행을 겪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어요. 실은 삶의 모든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그의 말처럼 정말 인생의 여러 길이 연결돼 있을까? 하기야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이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고, 길을 잘못 들어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걸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인생 열정뿐 아니라 어쩌면 퇴고의 과정도 그러한지 모른다. 초고에서 퇴고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어서 단번에 건너뛸 수 없다. 퇴고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각기 분리된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는 무수한 ‘고쳐쓰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한다. 곧은 직선이 아닌 둥근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 길을, 그 행로를 어떻게 지나느냐에 따라 글의 품격이 달라진다. ―이기주, 『글의 품격』, 황소북스,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