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위하여/정호승
슬픔을 위하여/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 까지는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시 읽기> 슬픔을 위하여/정호승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인 이유 2004년 초가을, 이 시를 우연히 다시 읽었을 때 느꼈던 특별한 울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건 당시 나 자신이 바로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임신 기간 내내 산모와 태아 모두 건강했고 예정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의사는 갑자기 ‘태아 돌연사’라고,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을 때의 진통이 어떠한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이미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겪어야 하는 진통을 표현하는 것은 나의 언어 운용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어찌 됐든 진통 끝에 아기는 이 세상에 나왔다. 딸이었고, 심장이 뛰지 않는 것만 빼면 여느 신생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사건이 준 참담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이 시를 읽었고, 어떤 희미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 그때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온 것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해 그저 감사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당연하다는 확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가톨릭 영세식엔 “죄의 근원이요 지배자인 마귀를 끊어버립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절차가 있다. 세례를 받으며 난 당연히 “끊어버립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찌 마귀가 어떤 실체일 수 있겠는가 나의 이 당치도 않은 확신에 깔린 교만과 아집이 바로 마귀인 것을, 난 사실 그것을 끊어내지 못했던(혹은 끊어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는 나의 이러한 교만과 아집을 뚝 끊어내는 칼과 같았다. 진정 슬픔은 ‘눈물이 나리라 칼’이었고, 이 칼은 누군가를 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욕망을 잘라내는 생명의 계시였다. 출산 휴가가 끝나고 다시 교단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앞의 학생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보이는 ‘차이’에 더 눈이 갔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와 공부엔 도통 관심이 없는 아이, 성실한 아이와 뺀질거리는 아이,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이 세상에 내어났다’는 어마어마한 공통점을 지닌 장하고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내 아이, 이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준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이다. 때때로 자신의 기분 하나 어쩌지 못해 빌빌거리는 이 허접스런 인격을 그래도 엄마라고 믿고 세상에 나와준 것이다. 이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나를 조금이나마 완성시킨 것은 분명 슬픔이었다. ―김경민,『시 읽기 좋은 날』, 쌤앤파커스,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