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8일 부활절 후 네번째주일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장 36~41절
꽃이 사는 동네에서 꽃이 말을 합니다. "너는 왜 생각을 배워 가지고 나한테 생각을 주는 것이냐? 나는 쉬운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그들은 쉬운대로 꽃을 해독하거든 그래서 피워야 할 꽃들은 아주 까다롭지...," 고철 시인의 생각에서 시는 생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음을 읽게 해줍니다.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인간이 날로 비인간화 되어 가는 사실이 현실이 된 날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이 시대의 고민은 요설이 심하고 가벼워지는 '비인간화'입니다. 뉴스를 보면 인간성이 어떻게 이토록 포악해 질 수 있을까? 하는 염려부터 생깁니다.
시대의 지성인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철저한 계획을 꾸며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들에 마치 연기하는 배우처럼 연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경악스러운데 하느님께서 보실 때 어찌 탄식하지 않을까요.
더 큰 문제는 매일같이 깜짝 놀랄 사건들을 접하면서 감정이 무디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인간화의 열차에 우리 모두는 함께 동승하고 있으니 나의 인간됨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싫든 좋든 협상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이며, 여기서 어느 쪽이든 Yes를 이끌어 내는 사람을 좋은 협상가라고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 내는 기술이 '협상'인가요?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기 위한 것이 협상인가요? 협상이란 함정은 옳고 그름이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협상하신적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은 생각만 숭고한 이상을 품고 있는데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랑과 선을 실천하는데 협상이 필요할까요? 사회적 약속과 협상하지 않으면 교회의 이상도 실행되기 어려운 현실일까요?
초대교회는 유무상통의 공동체로 물질과 지식이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지는 이상적인 사회였습니다. 이는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을까?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오순절에 받은 은혜가 그 뿌리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상식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을까요? 성령강림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날 나와 우리 그리고 교회가 외면당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교회 설립자인 최태용감독은 '영과 진리'를 강조하였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신체적인 어떤 변화들이 진리가 아니라 속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교회력으로 부활절 후 4번째 주일입니다. 중생의 기적을 체험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 보려고 노력해도 경험하지 않아 믿어지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내 죄를 대신 지셨다고 확신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은 어떠한 사실이 믿어짐이 아니라 나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고백이 나올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인생'이 기적이며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생의 역사가 사회적으로 나타나 실현되면 공동체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인간관계와 가치관 등 모든 것이 하나하나 변하여 협상하지 않아도 이상적인 교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 때문입니다. 진리가 나로부터 나와도 그 두려움의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와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일 무서운 것은 내 자신을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워 하시나요? 하느님을 무서워 하면 스스로 자신을 믿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심판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여기서 생긴는 두려움은 경건이며, 이 마음은 세상에 대하여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 용기는 절대권력의 핍박과 고난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그만 두려움에도 도망가던 베드로가 자신을 고소하는 서기관과 제사장들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게 바로 용기입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그와 동시에 용기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얻어지는 평안의 기적입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야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십자가의 사건을 상기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하여 그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 내가 나를 의롭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알기는 하는데 무슨 말을 해도 이해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데 어찌 재림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야 십자가가 깨달아지고 하느님의 사랑하심을 깊이 알게 된다는데 어떻게 해야 그러한 일들이 나에게서 이루어질까요?
과거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못을 박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이 굳은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입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 마음의 문이 열려 새로운 역사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갈증과 다릅니다.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감사로 협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가 말하던 성령을 선물로 받는 자녀가 되길 강복합니다.
꽃처럼 향기로운 사람이 됩시다. (고철 시인, 페이스북 친구 페이지서 공유함)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장 36~4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