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의 발자취 / 페북에서 옮겨옴

by 들국화 posted Oct 0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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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발자취 / 페북에서 옮겨옴

100억 넘는 학교를 나라에 내놓은 날, 아내가 “섭섭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김장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1991년, 김장하는 자신이 사재를 들여 세우고 키운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넘겼다.
당시 가치로만 100억 원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학교법인을 만들어 1984년 문을 연 뒤 겨우 몇 년 만에 학교가 자리를 잡자, 소유권까지 내려놓은 것이다.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내가 정말 아무렇지 않으냐는 취지로 물었다.
김장하는 별로 아쉬울 게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도 빈손이었고, 학교를 내놓은 뒤에도 먹고살 만큼은 남아 있으니 무엇이 섭섭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거창한 기부 선언보다 이 짧은 대화가 그가 돈을 대하는 방식을 더 잘 보여준다.
김장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남는 돈을 나눠준 사람이 아니었다.
1944년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친 뒤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무렵 그는 삼천포의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1962년 신문에 난 한약업사 시험 공고를 보고 일을 하면서 공부했고, 열아홉 살에 시험에 합격했다. 이듬해 사천 용현에 자신의 한약방을 열었고, 1973년 진주로 옮겨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했다.
장사가 잘됐다.
전국에서 약을 지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생겼고 한약방 앞이 붐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돈이 쌓이기 시작한 뒤 그의 생활이 함께 커진 것은 아니었다. 평생 자가용을 두지 않았고 가까운 곳은 자전거로, 먼 곳은 버스 같은 대중교통으로 다녔다. 옷도 오래 입었고, 한약방 건물 위층에서 생활했다. 한 달에 하루 정도만 쉬며 일했다는 주변의 증언도 남아 있다.
이런 검소함만 떼어놓으면 흔한 청빈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김장하에게 돈을 아끼는 일과 돈을 내놓는 일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약업으로 번 돈을 건강한 사람에게서 얻은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아파 찾아온 사람들이 지불한 돈이었다. 그래서 그 이익을 자기 한 사람을 위해 다 쓰는 것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오래 품었다고 직접 설명했다.
아마 자신의 학업이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서 멈췄다는 경험도 컸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댔다. 문제는 정확히 몇 명을 도왔는지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는 점이다. 영수증을 모아놓고 기부 실적을 관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그를 취재한 김주완 기자는 장학생이 적어도 1000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책과 다큐멘터리가 나온 뒤에도 “나도 도움을 받았다”는 제보가 계속 들어왔다고 한다.
더 눈여겨볼 부분은 돈을 준 뒤의 태도다.
보통 장학금을 받으면 “열심히 공부해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정도의 말은 듣기 마련이다. 김장하에게 오랫동안 도움받은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그런 훈계조차 거의 없었다. 어떤 단체를 지원해도 운영에 끼어들지 않았고, 학생에게 돈을 준 뒤 자신의 뜻대로 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도움받은 사람이 훗날 찾아와 보답하려 하면 그 보답을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사회에 돌리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다룬 책의 제목도 결국 《줬으면 그만이지》가 됐다.
여기서 김장하의 기부가 다른 미담과 조금 갈린다.
돈을 주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힘을 갖게 된다. 장학생에게 진로를 조언하고, 후원한 단체의 방향을 결정하고, 자신이 세운 학교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김장하는 이상할 정도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명신고를 세웠지만 학교 이름에 ‘김장하’를 넣지 않았고, 국가에 넘긴 뒤에도 뒤에서 학교를 좌우하려 하지 않았다. 장학금을 줬지만 장학생을 자기 사람으로 묶지 않았다.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평생의 채무가 되지 않게 한 것이다.
그가 내놓은 돈도 교육에만 머물지 않았다.
1990년대 시민주로 만들어진 지역신문을 후원했고, 진주가을문예를 20년 넘게 지원했다.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 신분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운동을 기리는 사업에도 앞장섰으며, 여성·환경·문화예술·지역사 연구와 시민단체에도 돈을 보탰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활동까지 지원했다. 한 사람의 취향에 맞는 분야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곳에 돈이 흘러가게 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런 일을 수십 년 했으면서도 정작 자기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싫어했다.
지역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해도 번번이 거절했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기부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김주완 기자가 처음 그의 삶을 취재하려 했을 때도 정식 인터뷰는 좀처럼 성사되지 않았다. 2015년부터 무려 7년에 걸쳐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김장하가 참석하는 자리에 따라다니며 조금씩 기록을 모아야 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흥미로운 것도 주인공이 자기 업적을 설명하는 장면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기억을 꺼낸다. 누군가는 학비를 받았고, 누군가는 문화행사를 이어갈 돈을 받았으며, 어떤 단체는 문을 닫지 않을 수 있었다. 정작 돈을 준 사람은 화면 앞에 나오는 일을 피했다.
이름을 알리려고 기부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하지만 김장하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일관된다. 돈을 건넨 순간 그 돈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고, 받은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까지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21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자신이 이끌던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현금 6억 5천만 원과 주식 평가액 약 28억 원을 합친 34억 5천만 원 상당의 재산 전부를 경상국립대에 넘겼다. 개인에게 되돌리지도 않았고 가족 재산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지역의 학술연구와 문화사업에 계속 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2022년, 50여 년 가까이 지켜온 남성당한약방도 문을 닫았다.
시민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가는 행사조차 처음에는 본인이 알고 화를 내는 바람에 무산될 뻔했다. 고맙다는 말을 듣는 자리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셈이다. 결국 사람들은 그가 피하기 전에 조용히 꽃을 들고 찾아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생겼다.


그토록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 일하던 공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주시는 옛 남성당한약방 건물을 보존해 2025년 ‘진주 남성당 교육관’으로 문을 열었다. 1층에는 실제 한약방의 모습을 살렸고, 위층에는 진주의 역사와 평등·시민정신을 소개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개관식에서 김장하는 또 자기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요지는 예전과 같았다.
“줬으면 그만이지.”
어쩌면 이 말이 김장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100억 원이 넘는 학교를 내놓고도 교문에 자기 이름을 새기지 않았고, 천 명이 넘는 학생을 도우면서도 그들의 인생에 자기 지분을 요구하지 않았다. 수십억 원의 재단 재산을 다시 사회로 돌려보낸 뒤에도 버스를 타고 다녔다.
많이 준 것만으로는 이 사람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더 드문 건 주고 난 뒤의 태도였다.
사람을 도왔지만 그 사람을 빚진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고, 돈을 냈지만 그 돈이 가는 곳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 했는데도 결국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