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는 선명하지 않을수록 좋다(쓰는 몸으로 살기)/김진해
주제는 선명하지 않을수록 좋다 “가르치려 들지 마.” 시시콜콜 뭘 자꾸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만나면 심사가 뒤틀립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지만 배알이 꼬입니다. 저 또한 나도 모르게 남을 가르치려는 버릇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밥맛이죠.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황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질서를 찾으려 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하죠. ‘이건 이런 거니까 이렇게 하고, 저건 저런 거니까 저렇게 해.’ 가르치려 드는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글을 쓸 때면 정색하고 뭔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치지 않으면 글이 아니라는 듯이. 하기야 국어 시간에 글을 읽으면 곧바로 ‘이 글의 주제는?’하고 물었으니까요. 가라앉은 무언가를 건드리는 주제는 보여주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그렇게 할 때 내가 제시하는 사건이나 대상이 스스로 소리치고 글을 읽는 사람이 자유롭게 주제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동안 ‘주제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왔을 텐데, 이게 뭔 소린가 하시겠네요. 예를 몇 개 들면서 풀어가 보죠. 아래 박준 시인의 시 <연년생>을 한번 읽어봅시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 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박준, <연년생>,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저한테 좋은 글은 장면 하나를 보여주는 겁니다. 병원에 실려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연년생 형제가 내뱉는 호칭이 달라지는 장면입니다. 이 글(시)의 주제가 곧바로 떠오르나요? 작가는 이 글에서 주제를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무덤덤하게 기록할 뿐입니다. 이웃이라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끔 들었겠죠. 그 집 아주머니를 형은 ‘어머니’라 부르고 동생은 ‘엄마’라고 불렀나 봅니다. ‘어머니’와 ‘엄마’의 차이가 느껴지죠? 연년생이지만, 형은 맏이의 의젓함을, 동생은 막내의 어리광을 잃지 않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라집니다. 형은 ‘어머니’를 ‘엄마’로 부릅니다. 맏이의 의젓한 풍모는 온데간데없고 어린아이로 바뀝니다. 동생도 엄마가 생사의 갈림길 앞에 섰음을 알아차렸을까요. 이때 외치는 ‘형’은 한 살밖에 많지 않은 형을 향한 전적인 의탁 같은 거겠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어린애가 됩니다. 여기서 ‘엄마’라는 말은 호칭이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깝죠. ‘형아’라는 말도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자 막막함이 담긴 외침일 겁니다. “형,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주제는 그런 거 같아요. 우리는 주제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선명한 메시지’로 생각하는데, 도리어 글을 읽는 사람의 밑바닥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깨워 일으켜 세우는 무언가가 아닐까요? 주제는 독자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눈알만 굴리는 게 아니라 먼지 쌓인 창고에 발을 디딜 때처럼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일렁거리며 솟아나게 합니다. 주제와 숨바꼭질하기 그가 깨어났을 때, 공룡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Cuando despertó, el dinosaurio todavia estaba alli.) 또 다른 예를 보시죠. 이 문장(?)은 아우구스토 몬테로소라는 작가가 쓴 세계에서 가장 짧은 소설 <그 공룡>의 전문입니다. 어떤가요? 소설 같나요? 저기에는 짧고 건조한 사건만 있습니다.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났고 그 순간까지도 공룡이 곁에 있었다네요. 그렇다면 공룡은 그가 잠든 사이에도 있었겠지요. 아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 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그를 지켜주려 했는지, 잡아먹으려 했는지, 일어나면 같이 놀려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머릿속에 다양한 상상이 무한히 이어지게 됩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여러 화가가 이 소설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두 가지만 보자면 그림과 같습니다. 느낌이 서로 다르죠. …<사진 생략>… 《시인의 사물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시인 52명이 사물 52개에 대해 쓴 산문집입니다. 함민복 시인은 ‘시계’에 대한 단상을 짧은 연작 형식으로 썼는데요. 그 한 대목을 보시죠.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아 형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랫목에 누운 아버지가 두 번 시간을 물었다. 형이 왜 안 오느냐고 했다. 목이 마르다고 해 전기밥솥을 열고 데운 베지밀 병을 꺼내 따드렸다. 힘들게 앉은 아버지가 베지밀 병을 내려놓고 시계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아버지가 좌탈입멸하고 십 분쯤 지난 후 형이 왔고 이상하게도 시계가 멈춰 있었다. 그 후 오 년간 베지밀을 먹지 않았고 지금도 시계가 멈추면 불길한 생각이 앞선다. ―함민복, 〈시계〉, 《시인의 사물들》, 한겨레출판, 2014년 218쪽. 이제 감이 좀 잡히시나요? 아버지가 그립다거나 형이 원망스러웠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벌어진 일에서 딱 멈춥니다. 주제는 숨바꼭질 같아야 합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내 진실에 다가가기 위하여 글 쓰는 목적을 ‘순수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자랑과 연민, 이 두 가지 감정을 분출하는 걸 글 쓰는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내 진실에 다가가기. 내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쓰기.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써서 내가 다른 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려고 쓰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기록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라는 제목으로 대상 하나를 정해 꾸준히 관찰하면서 A4용지 60장 분량의 글을 쓰고 제대로 편집도 해서 출판까지 해야 하는 ‘빡센’ 과목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3년 전 수강했다가 F학점을 받은 학생이 지난 학기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두 달이 지나도록 주제를 잡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엄마를 관찰하겠다고 했다가, 어떤 언니를 하겠다고 하다가는, 결국 자기 자신을 관찰해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주제를 못 잡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을 직시할 용기, 그 학생은 아홉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반지하 월세방 한곳에서만 살았습니다. 지난여름이 돼서야 임대주택에 당첨돼 지상으로 올라왔더군요. 지긋지긋한 가난이 자신을 어떻게 쪼그라들게 하고,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주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느끼는지, 돈 때문에 친구와 애인마저 사귀지 않게 됐는지, 가난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됐는지, 이혼한 엄마와 둘이 살면서 어떻게 생활비를 직접 버는지,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엄마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대출받고 그걸 갚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밤과 주말을 알바로 소진했을지를 글로 쓸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걸 해내더군요. 한 대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남자친구는 항상 나를 집에 대려다줬다. 처음엔 엄마, 아빠가 동네 산책을 자주 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큰 길에서 헤어지자고 했다. 가까워질수록 집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늦은 시간엔 여자친구 혼자 깜깜한 골목길을 가게 할 수 없었는지 오빠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우리 빌라를 오빠에게 보여주었다. “어디가 너네 집이야?” 올 것이 왔구나. 대충 불이 켜져 있는 4층 베란다를 가리켰다. 또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오빠가 집에 대려다줄 때는 4층까지 올라가는 척했다. 계단 중간중간에 창문이 있어서 오빠는 올라가는 내 모습을 끝까지 바라봐주었다. 4층 창문에서 환하게 손을 흔들며 어른 가라고 손짓했다. 진심으로 얼른 갔으면 했다. 창문에서 보이지 않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서 센서 등이 꺼지길 기다렸다. 집으로 들어간 척을 하며. 남의 집 복도에서 그러고 있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중략) 데이트 비용이 부담되면서도 아닌 척하며 잘 놀러다녔지만, 속으로는 돈 걱정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만남이 기다려지지 않았고 이유를 말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저는 난생처음 학생의 글을 읽다가 연구실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보이지 않은 계단에 주저앉아 센서 등이 꺼지길 기다렸다’는 말 앞에서요. 웅크려 어둠을 기다리는 청년의 어깨가 보여서요. 이 학생의 글이 가진 장점을 자기 연민에 빠져 징징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연미에 빠져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 과시욕을 참을 수 없는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가난을 말할 용기를 냈을 뿐입니다. 그러곤 멋 부리지 않고 말하듯이 써 내려갔습니다. 이 글의 주제를 떠 올립니다. 그는 주제를 직접 말하지 않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서사)를 말할 뿐입니다. 그 이야기가 진솔하기만 하다면, 그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가난을 이겨내자’라거나 ‘가난해도 행복하다’ ‘가난이 주는 비참함’ 따위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난을 미화하거나 어떠한 윤리적 메시지로 뒤바꾸지 않습니다. 삶은 윤리로 간단하게 치환할 수 없어 복잡하고 오묘합니다. 그 구차함을, 불가항력을, 창문 아래로 몸을 숙이는 몸짓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게 쓰고 그는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독자도 움직입니다. 이 글을 읽고 ‘가난이란 뭔가, 가난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따위의 윤리적 상상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저를 응원해주시는 시인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너무 잘 쓰려고 하지마.” 잘 쓰려고 함은 글에 힘준다는 건데, 그러면 반드시 ‘완력’을 쓰게 됩니다. 완력腕力은 ‘팔뚝의 힘’입니다. 한편의 글로 뭔가 획기적이고 남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얘기를 하겠다는 완력은 가짜 힘이고 금방 들통나는 힘입니다. 주제를 드러내놓고 강요하는 겁니다. 무술에서도 자기 의도를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어떻게 주제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섣불리 주제를 발설하기보다는 비닐에 싼 김치처럼 주제의 냄새가 스멀스멀 배어 나오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주제보다는 내가 다루는 글감에 한 발 더 다가가 남과 다르게 보겠다는 강박을 가져야 합니다. ―김진해, 『쓰는 몸으로 살기』, 한겨레출판, 2025. |
*** 박수호 詩 창작 강의자료 방에서 공유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