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글의품격)/ 이기주

by 들국화 posted Jan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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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글의품격)/ 이기주
가장 본질적인 재료
 
어느 시인의 사연이다.
시인은 수년간 남편 곁에서 병간호에 매달렸다
남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병마와 싸웠지만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시인은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낸 지 몇 달 뒤였다.
창밖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비가 내렸다.
시인은 두 손으로 빗방울을 받아내며 말했다.
여보오늘은 종일 비가 올 것 같아요.”
 
시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남편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시인은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이 곁을 떠나면
빈 자리에 허전함과 서러움이 채워진다는 것을.
 
시인은 문득 떠올렸다고 한다.
남편의 육신이 무너져가던 어느 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수없이 외쳤던
제발 내 곁에 머물러줘요라는 문장을.
 
차를 몰고 강변을 달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시인의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시인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남편의 빈자리가 휑하게 드러나는 순간 시인의 마음은 으깨어졌으리라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으리라.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아니다쓰라린 사연인 블랙홀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공백은 애당초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공란과 비슷한 반면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여백은 존재가 아닌 부재不在의 결과다만나고 헤어져야다가왔다가 멀어져야소유하던 것을 잃어버려야 여백에 닿을 수 있다.
때론 눈물이라는 열쇠로만 우린 여백의 문을 열 수 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은 풍성한 여백이 행간을 메운다선생은 유학시절 아사코라는 여성과 맺은 인연을 회상하며 아스라한 추억에 잠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세 번째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의 마지막 단락에 새겨진 연꽃 같은 문장이다읽을수록 묘한 헐거움이 느껴진다성기고 거친 것과는 다르다 여백을 지우개 삼아 불필요한 문장을 지우고 글의 이음매를 일부러 느슨하게 연결한 듯 하다.
이쯤해서 괜한 상상을 해본다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선생이 아사코를 잊지 못한 나머지 어느 날 갑자기 현해탄을 건너 그녀를 다시 찾아갔다면 수필의 제목은 인연이 아니라 재회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만약 그랬다면 글의 여백은 물론 여운도 적잖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채움이 아닌 비움이 여운을 남기는 사례는 말마다 우리 곁을 스펴 지나간다.
몇 해 전 뉴타운 공사가 한창인 지역을 지나다아파트 분양을 알리는 현수막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현수막에 박혀 있는 문구는 거의 비슷했다. ‘지하철역에서 도보 5’, ‘초중고 인접’, ‘합리적인 분양가에 중도금 무이자 혜택까지’ 같은 문장들이 점령군처럼 현수막을 빼곡하게 장악하고 있었다보험 상품 약관 하단에 적혀 있는 깨알 같은 글자처럼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당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차를 돌리려는 찰나사뭇 다른 분위기의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바람에 나풀거리는 하얀 현수막 한가운데를 짧은 문장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여보우리 마지막 이사는 여기로 갑시다!”
 
동양의 이단아로 불리는 김호득 수묵화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연륜이 쌓일수록 여백을 그리는데 힘을 쏟게 된다고 말했다.
난 공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예전에는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이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먹을 듬뿍 먹은 커다란 붓으로 강렬한 선을 그은 듯한 김화백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글도 그림도 힘을 빼고 여백을 만들어야 지면과 화폭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본질적인 재료는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을 다 채우기보다 적절하게 비워내고 그 비움의 파편들을 모아서 크기와 높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공간을 지을 때문장과 문장 사이로 햇빛과 바람을 불러들일 수 있고 글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린 펜이 아니라 여백을 쥐고 글을 쓰는지 모른다빽빽한 활자 사이사이에 삶의 희로애락이 깃든 각자의 공간을 새겨 넣기 위하여.
―이기주, 『글의 품격』, 황소북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