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글의 품격)/이기주
마음 ―생각과 감정이 싹트는 곳 봄 햇살이 온누리에 내려앉을 무렵 어머니가 수술대에 누웠다. 다행히 예후가 좋았다. 함암 치료까지 무사히 마친 어머니는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난 무심결에 병식 밖을 내다봤다. 겨울이 그린 밑그림 위에 봄이 채색되고 있었다. 땅에서 솟아난 꽃들이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자라나 사방으로 하늘거렸다. 지상은 온갖 생명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눈앞에 거른거렸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온다. 이는 비가 그치면 해가 뜨고, 해가 지면 서녘 하늘이 검붉게 물드는 것처럼 순리에 맞고 당연한 일이다. ‘봄’은 ‘별’, ‘보다’ 같은 단어와 어원적으로 밀접하다. 봄이 오면 볕이 본격적으로 지상에 내리쬐기 시작하고, 그즈음 우린 새싹이 돋아나는 현상을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이날 나는 창밖에 펼쳐진 봄 풍경을 눈으로 만끽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벗어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는 침대에 앉아 창밖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머니가 겨우 입술을 움직여 병실의 침묵을 깨트렸다. “기주야, 이번 봄은 다른 봄들보다….” 난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읊조린 문장이 너무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봄이 아름답다’는 감탄은 수없이 했고 다채롭게 표현도 했다. 감히 ‘과거의 봄’과 ‘현재의 봄’을 비교하거나 대조한 적이 없을 뿐이다. 살다 보면 육안肉眼으로 응시한 것을 심안心眼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삶을 떠받치는 가치, 달지도 쓰지도 않은 미묘한 맛, 사랑하는 사람을 쓰다듬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려면 심안을 부릅뜨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계절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병실 창문을 내다보며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는 “이번 봄은 다른 봄들보다 아름답다”는 글귀를 수첩에 또박또박 적었다. 평소 나는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문장을 매만진다. 이는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인데, 일상의 모든 것이 배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과 문장이야말로 내겐 공부의 대상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건네는 일상의 떨림이 내겐 커다란 울림이 된다.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토해낸 짧은 문장은 내 귓속에서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어머니는 왜 그런 문장을 읊조린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동안 수첩을 놓지 못하고 어루만지던 나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어머니가 창밖을 보며 느꼈을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쪽으로 가까스로 넘어온 어머니로선, 퇴원하는 날 마주한 봄이 수십 년간 스쳐간 그것들에 비해 각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었을 봄날의 풍경이…. 생의 끝자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려가며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기 위해 분투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내게 봄은 두 얼굴을 지닌, 조금은 슬픈 계절이다. 봄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을 굳이 끄집어 낸 이유는 붐의 양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음으로 계절을 음미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글쓰기에 관한 나름의 생각과 소신을 펼쳐놓고 싶어서다. 평소 사인회나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글쓰기 내공을 비약적으로 기를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이 귓속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대답을 망설인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수학이나 물리학과는 달리 올바른 공식이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 글쓰기에 대한 질문은 쓸데없는 것인가? 헛것인가? 그럴 리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에서 사장 깊은 물음은 뚜렷한 답이 없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명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의 경우,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들다 보면 어는 순간 답에 가까운 이치를 발견하거나 아예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글쓰기에 대해 궁구하는 일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삶에 보탬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난 글쓰기에 관한 질문에 휩싸일 때면 몇 초간 숨을 들이마신 뒤 슬며시 입을 연다. “잘 쓰는 것보다 잘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을 들여다보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한때 소중했던 것들》은 모두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 태어났다. 글을 쓰는 일은 마음이 상태를 살피고 기록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돌아보면 내 마음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글쓰기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스스로 내면을 향해 걸어 들어갈 즈음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언제나 길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마음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의 정체는 뭘까.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멈추는 걸까. 아니, 멈추는 순간이 있기는 할까. 마음은 텅 비어 있을까. 아니면 감정과 기분이 물들어 있을까. 글쎄다, 적어도 한자 문화권에선 마음의 가치를 높이 샀다. 마음을 뜻하는 심心은 심장을 빼닮았다. 이는 마음이 심장처럼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이며, 때론 모든 일의 근본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한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을 ‘대체大體’라고 했다. 마음은 인간 사유의 바탕인 동시에 도덕적 능력을 지닌 커다란 몸에 가깝다는 것. 반면 일부 뇌공학자는 ‘마음=뇌의 작용’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뇌 신경세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마음도 빚어진다는 논리다. 그럴듯한 얘기다. 하지만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등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의 지평이 넓어졌음에도, 과학은 여전히 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그로 인해 감정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뇌와 마음이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면, 차라리 상상력을 동원해 접근하는 건 어떨까. 난 마음의 정체에 대해서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의 본질에 대해선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강가에 뒹구는 조약돌 같다고 생각한다. 낮 동안 햇살에 달궈진 조약돌은 저녁 어스름이 내려도 따듯함을 유지한다. 마음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아무리 현실이 팍팍해도,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의해 슬며시 데워진 마음은 한동안 온기를 지닌다. 이때 냉기가 감돌던 마음이 데워지는 과정에서 나름의 온도 차가 발생하는데, 그러면 세상살이에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 어쩌면 우린 마음이 따듯해질 때 생겨나는 휘황한 힘으로 삶을 이어가는 게 아닐까. 곁에서 마음의 온기를 건네주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세월을 버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과 사고 체계가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할 ‘사思’의 구조를 보자. 밭 전田과 마음 심心이 합해진 형태인데 혹자는 이를 ‘마음의 밭’으로 해석한다. 마음이라는 땅에서 생각이 농작물처럼 자란다는 얘기다. 일리가 있다 생각은 종종 마음에서 돋아나거나 적어도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모든 생각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마음이 생각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터전으로 작용한다. 돌이켜보면 나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과 사람과 사연이 오감을 거쳐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던 순간, 내 안에선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현미경 들여다보듯 ‘나’를 탐구했다. 내면에 싹튼 뜨끈한 생각과 감정이 식어버리기 전에 지면과 화면에 바지런히 적었다. 참신한 표현이 떠오르면 길을 걷다가도 멈춰 서서 휴대폰 메모 애플리케이션으로 재빨리 낚아챘다. 시간이 지나 마음의 신열이 식으면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때 메모 앱에 저장한 구절을 화면에 그대로 옮기지 않고 완결된 구조로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언덕에서 작은 눈덩이를 굴리면 점성이 생겨 커다랗게 변하는 것처럼, 메모장에 저장한 ‘언어의 온도’라는 표현을 노트북으로 불러내 다양한 방식으로 자르고 붙이면서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라는 문장을 도출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음은 한없이 원초적이고 예민하다. 거기엔 삶의 희로애락이 촘촘히 각인된다. 밝은 무늬만 새겨질 리 없다. 슬픔과 좌절처럼 어두운 문양까지 고르게 새겨진다. 그러므로 삶을 온전히 글로 옮기려면, 마음에 울려 퍼지는 희망과 환희뿐 아니라 울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통곡과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의 미소만이 아니라 눈물까지 살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기주, 『글의 품격』, 황소북스, 2019. ** 박수호 시창작에서 공유함** |